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15 광저우 쿠데타 (문단 편집) === 우한 정부와 리지선의 갈등 === [[천도논쟁]]에서 장제스가 패하여 국민정부가 우한으로 이동한 후, 광저우는 배경 단락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리지선이 장악한 상태였다. 우익인사였던 리지선은 광동에서 군정을 강화하여 노동조합을 탄압했으며 미하일 보로딘을 압박하여 강제중재제도를 도입하였다. 한편 1927년 시점에서 우한 국민정부의 주요 수입은 호북에서 걷는 약간의 아편세와 더불어 광동의 세입이 전부였다. 절강, 강소, 복건 지역은 장제스가 장악하여 중앙에 재정권을 내주려 하지 않고 있었고 호남성은 너무 가난하여 돈이 벌리지가 않았다. 재정부담이 너무 심각해지 우한 국민정부는 각지 주둔군에게 군비 조달을 알아서 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되었다. 1926년 12월 1일부로 재정부는 각 주둔군에게 군비 지급을 중단했다. 1927년 1월 행해진 [[난창 군무선후회의]]는 호북성과 강서성에 300만월, 호남성에 60만원에 군비를 부담하게 하고 부족액을 재정부가 떠맡기로 결의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각군이 현지에서 군비를 조달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는 재정부담을 경감시키는 한편 각 군장들을 군비를 무기로 제압하려는 우한 국민정부의 계획이었으나 장제스를 비롯한 각 군장은 군비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자 극도로 분노하게 되었다. 한편 광동성은 매달 400만원의 자금을 무한 국민정부에 송금하고 있었는데 광동성이 국민정부가 장악한 지역 중에서 제일 부유한 곳이었으므로 광동성으로 각 세력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1927년 2월 실업부장 겸 광동성 재정청장으로 [[쿵샹시]]가 임명되면서 광동성의 재정문제는 조용해진 듯 싶었지만 광동성 군사청장을 겸하고 있던 리지선은 휘하의 4개 사단을 확충하려는 자금 70만원을 우한 측이 주려하지 않자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 때문에 리지선은 군사청 없는 군사청장이 되어 직함만 있지 지휘할 부서가 없었다. 재정권을 확보하려는 우한 국민정부와 군비 문제로 큰 갈등을 빚은 리지선은, 장제스를 견제하기 위해 공산당과 친밀한 입장을 보였던 [[청첸]], [[루디핑]]이나 눈치를 보며 애매한 태도를 유지한 광서파와 달리 장제스의 반공 구상에 적극적으로 동의를 표하며 장제스를 지지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장제스는 광서파를 다그쳐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부대들을 해산시키고 급기야 4월 12일,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한편 우한 국민정부는 장제스가 어느 정도의 행동을 취할 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장제스와 회동한 리지선의 중앙집행위원, 총사령부 총참모장, 군사위원직을 박탈하는 등 강경한 모습만을 보이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